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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대관(Kim DaeKwan) 개인展 [2013.4.16 - 5.11]

작성자
필립강갤러리
작성일
2013.04.16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2750
내용



Kim DaeKwan (b.1965) : Korean Painter





막막한, 가없는, 아득한, 그리운 강물

 

고충환 (미술평론가)

 

강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질 때가 있다. 처음에는 강물과 함께 그 강물을 쳐다보고 있는 내가 같이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불현듯 지워지고 강물만 보인다. 강물과 의식이 서로 분리돼 있다가 점차 강물이 의식 쪽으로 건너와 스며들고 차고 넘쳐 종래에는 의식을 온통 침범하고 잠식하는 탓이리라. 이처럼 강물이 의식 쪽으로 범람할 수는

있어도 의식이 강물을 범람시키지는 못한다.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강물을 무미건조한 개념으로나 환원할 수 있을 뿐. 여하튼 이렇듯 의식이 강물로 범람할 때 강물은 흐르는 것도 같고 흐르지 않는 것도 같다. 그러나 분명 강물은

흐른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멈춰선 것도 같고 흐르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의식이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느리기는 하지만 분명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강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른다. 이렇듯 흐르는 성질을 공유한 탓에 강물은 시간의 유비가 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만물유전이다. 모든 존재는 항상적으로 변화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 이렇게 강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르고 존재도 흐른다. 흐르는 존재를 붙잡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가없고 덧없고 막막해진다.

김대관은 독일 할레에서 유학할 때 곧잘 인근에 있는 강을 따라 산책하곤 했다. 그러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삭이고 키웠다. 고향에도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고향의 강이 범람하고, 이국의 강이 범람해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강이 흐르게 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강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곧 향수를 의미했고, 그 시절로 회귀하는 시간(시간여행)을 의미했다. 그리고 작가는 흐르는 강물에 착안해 그 향수며 시간을 조형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기에 이르고 그 욕망을 작업으로 풀어낸다. 여기서 작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은 다만 그 종류와 성분, 깊이와 폭이 다를 뿐 우리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한 줄기 쯤은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향수의 강, 시간의 강, 회한의 강, 그리고 망각의 강 등등. 그러므로 강을 소재로 한 작가의 주제와 작업은 작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마음속에 범람하면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그러나 말이 쉽지 마음속에 흐르는 강을 조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마음도 그렇거니와 강 역시 정해진 형태가 없다. 얼핏 색이 있는 것 같지만 천변만화의 스펙트럼을 아우르고 있어서 어떤 결정적인 색채로 환원하거나 한정할 수가 없다. 형태도 비결정적이고 색채도 비결정적이다. 형태나 색채가 자연현상(예컨대 빛의 강도나 대기의 조건)에 연동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마음과도 연장돼 있다면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마음의 프리즘을 통해본 형태와 색채는 결국 질료를 품으면서 넘어서는 문제며 감각의 문제며 암시의 문제다. 이렇듯 감각적이며 암시적인 강을 어떻게 붙잡을 수가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유리회화를 생각해낸다. 물이 그렇듯, 빛을 투과하는, 그래서 투명한 성질을 갖는 유리판 위에 채색이 얹힌다면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을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을 투명하게 하는 것도 물의 질료 속으로 투과하게 하는 것도 빛이다. 비록 질료는 다르지만 유리 역시 마찬가지다. 빛이 매개가 되어져서 물과 유리를 상동하게 한다. 빛이 없으면 그 상동한 성질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물을 암시하기 위해서 빛도 같이 암시되어져야 한다. 유리회화를 통해서 물(물의 질료)을 감각하게 하고, 동시에 빛(빛의 질감)을 암시하는 것.

강물의 형태도 그렇지만 특히 색채는 자연현상에 연동돼 있다고 했다. 맑은 날에 강물은 파랗게 보이고 더 맑은 날에는 아예 옥색으로 보인다. 그 옆에 숲을 끼고 있을 때 강물은 연녹색으로 보이다가도 녹색과 때론 짙은 녹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수면 위에 노을이 드리워질 때면 강물은 물의 색깔 위로 빛의 색깔을 밀어 올린다. 노란 색에서 주황색과 빨강색 사이에 위치하는 색채 스펙트럼을 온통 아우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날이 어둑해지면 파란 색은 군청색으로 짙어지다가 점차 어둠 속에 묻힌다. 어떤 색의 경우이건 색채의 이면에 투명한 깊이를 간직하고 있고, 어떤 특정의 색채로 환원되거나 한정되지는 않는, 몇 가지 색채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그저 색채라기보다는 색채의 기미, 색채의 느낌에 가까운 어떤 비전을 열어 보인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색채의 종류와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된다. 결국 작가의 작업에서 이런 색채의 기미, 색채의 느낌(그 자체가 물의 기미며 빛의 느낌에 연동된)을 재현하는 것이 핵심이며 관건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우선 유리판에다가 유리착색안료를 칠한다. 이때 가녀린 라인 테이프로 화면의 일정부분을 가려 안료가 묻지 않게 한다(테이프는 이후 떼 내거나, 아마도 소성과정에서 불에 타 없어지는 특수 테이프를 사용할 듯). 이 상태로 620도까지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며 가마에 구워낸다. 그리고 재차 색을 덧칠하고 구워내기를 수차례(대개는 여섯 차례 이상)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표면에 은근하면서도 투명한 질감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착색된 두 장의 유리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시키는데, 같은 계열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킨다. 이를테면 좀 더 짙은 청색과 좀 더 엷은 청색이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켜 같은 색조를 유지하면서도 라인 테이프로 처리한 빈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 빈 라인 위에 대개는 대비되는 보색의 점들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여기서 안료가 착색된 유리판은 수면을 암시하며,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시각적 현상으로 인해 수면의 방향(혹은 평형)과 유속(물이 흐르는 느낌)을 암시한다. 더불어 수면에 던져진 빛의 편린들을 암시하며, 이는 점점이 찍힌 점(광점)들에 의해 강조된다. 이렇게 해서 물이 흐르는 느낌과 함께 수면에서 난반사되는 빛의 산란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무슨 도해라도 하듯 역추적하고 재구성해봤지만, 작가의 작업은 기계적인 과정이나 느낌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같은 계열의 색조가 중첩된 화면이 특정의 색채로 환원할 수는 없는,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깊이감이 느껴지는 색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역시 중첩된 화면으로 인해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면서 다양한 선의 변주를 만들어낸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서 투명하면서도 깊은 물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물의 표면에서 물과 희롱하는 빛의 기미를 자아낸다. 그 질감과 기미에 힘입어 정적이고 서정적인 느낌과 함께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계기에로 이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작가의 유리회화 중엔 수직성을 강조한 경우가 없지 않지만, 대개는 옆으로 긴 화면으로써 수평을 강조한 경우가 많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옆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을 따른 것이며(여기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그래서 수직적으로 흐른다는 자연과학적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옆으로 펼쳐진 자연의 생리를 따른 것이다. 이처럼 옆으로 가없이 확장된 수평의 풍경은 수직의 풍경에 비해 쉽게 풍경에 동화되게 만든다(이에 반해 수직의 풍경은 흔히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으로 숭고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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